앞이 잘 보이지 않아도, 한걸음씩 찬찬히 김금희의 소설은 어느덧 우리 시대의 보편이 되어버린 막막한 현실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고 집을 나가 자취를 감추었거나(「너의 도큐먼트」), 허울뿐인 베트남 참전 경험만 믿고 허황하게 사업을 벌이다 IMF에 떠밀려 좌초되거나(「장글숲을 헤쳐서 가면」), 일평생을 몸 바쳐 일했지만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회사에서 밀려나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아이들」). 그다음 세대에게도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아, 소설의 주인공들은 갓 상경해 입사한 회사를 수습기간도 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거나(「우리 집에 왜 왔니」), 다단계 회사에 들어가 몇달씩 헛된 꿈을 쫓기도 하고(「아이들」), 서울의 변두리를 전전하다 회사 사무실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거나(「릴리」), 고단한 일상을 견디며 철거 중인 오래된 판자촌을 지키고 있다(「집으로 돌아오는 밤」). 개인의 삶을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야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김금희의 소설이 돋보이는 점은 자신이 처한 곤경에 유난 떨지 않고 손쉽게 환상에 기대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어정쩡하게 타협하지도 않는 차분한 균형감각이다. 「너의 도큐먼트」의 주인공은 어머니의 제안에 따라 집 나간 아버지를 찾으러 지도를 들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는데, 거리거리를 계획 없이 어슬렁거리는 그 하릴없는 여정의 사이에, 옛 친구의 죽음을 전해듣고 해묵은 부채감에 친구의 집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가 나란히 놓인다. 이 탐색은 결국 아버지의 현재와 친구의 죽음 양쪽 모두와 지금의 자신 사이에 가로놓인 현실적인 거리감을 확인하는 데서 그치게 되어 있지만, 소설은 그 공백의 자리로부터 자신만의 길을 어렴풋하게 열어나가는 주인공의 성장을 담담하게 그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