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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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이 말하는 『손님』

* 『손님』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하여

내가 방북했을 때 저쪽에서 방문 코스와 스케줄을 협의해왔는데 다른 방북자들도 그랬겠지만 나름대로 선택을 하거든요. 나는 만주에서 태어나 외가인 평양에서 몇년 살다가 삼팔선을 넘었으니까 한번도 본적지에는 가보지 못했어요.

하여튼 황해도 신천(信川)을 방문했는데 매우 암울하고 북한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낙후된 인상을 받았어요. 신천에는 ‘미제 양민학살 기념관’이 있고 군(郡) 전역에 걸쳐서 학살장소를 보존하고 있어서 더욱 어두웠습니다. 안내원이 격앙된 어조로 전쟁시기의 미군의 만행에 대하여 치를 떨며 설명하고 그 물적 증거물들을 보여주는 식이었지요. 남한에서의 좌우대립에 의한 농촌공동체의 파괴에 대하여 어릴 적부터 지겹도록 듣고 보아온 나로서는 분노보다는 죽은이들의 신발이라든가 옷가지, 또는 머리카락 따위 물건들의 생생한 보존과 인형으로 만들어놓은 참상의 실감나는 재현 등에 소름이 끼쳤어요. 더구나 끔찍한 것은 전 군민의 4분지 1에 해당하는 3만 5천여명을 학살했다는 것이지요. 몇번의 방문 중에 알게 되었지만 황해도에는 본토박이들이 많이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함경도나 평안도에서 이주시킨 사람들이 많았어요. 북한에서 월남자가 가장 많이 나온 지역이라는 겁니다. 미군은 남한에서도 그랬고 북한지역의 곳곳에서 양민학살을 저질렀지만 이 지역에서만은 머무를 시간이 없이 곧바로 만주의 국경지대를 향하여 북진했고, 중국군이 참전하자 일제히 후퇴했다고 전사(戰史)에 나와 있어서 이건 무엇인가 좀 이상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베를린에 돌아가자마자 여러가지 자료를 뒤지기도 하고 황해도 지역에서 월남한 해외동포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황해도에는 봉건시대부터 토착 대지주가 별로 없었지요. 북에서는 유일한 곡창지대인데 대지주가 별로 없었다는 게 잘 이해가 안 가지요. 조선시대부터 황해도는 토질이 좋은데다 토반세력은 형성되지 않아 일찍부터 궁방전(宮房田)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궁에서 온 하급아전들과 지방 마름〔舍音〕들이 지주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곡산군수로서 목격한 황해도의 백성들이 일년에 여덟 가지, 많게는 열 가지 이상의 부역을 지고 있어, 남도에서 아전의 수탈과 폐해가 가장 심한 전라도보다 더하다고 탄식할 정도였지요.

일제가 들어오면서 궁방전은 곧 국유화되거나 동양척식회사를 비롯한 일제의 경제기관에 흡수되었어요. 구한말 식민지시대에 이르면 이들 관리인 계층이 중농층을 이루게 되는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북선지방 사람들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고 신분상승을 하려면 기껏해야 향시나 보고 실직(實職)이 아닌 직함으로 지방에서 행세깨나 할 정도였지요. 그러므로 이들은 진충보국(盡忠報國)에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개화하여 신지식을 받아들이거나 했습니다. 안중근이나 김구 같은 이들의 배경이 그렇지요. 식민지시대 북선에서 개화 지식인은 두 가지 상반된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는 기독교를 통해서, 다른 하나는 당시의 선진사상인 사회주의를 통한 개화였지요. 사실 이들의 뿌리는 하나였던 셈입니다.

해방이 되어 항일빨치산 세력이 북한정권의 실세가 되었고 겨우 두어달 동안에 토지개혁이 이루어지는데, 남쪽에 미군정이 있는데다 시간도 없었으며 또한 전투경험은 많지만 현장 당활동이나 교육경험이 없는 그들로서는 지방에서 여러가지 무리를 빚게 됩니다. 열정이 넘치는 반면에 교조적인 젊은 당원들은 평양은 물론이고 신의주나, 함흥, 원산 등지에서 기독교로 대표된 민족 부르주아지들의 저항에 부딪칩니다. 더구나 당의 이론가들은 거의가 소련에서 교육받고 자라나 조선의 실정을 모르는 스딸린주의자들이었습니다. 토지개혁을 담당할 요원들은 모두가 이른바 기본계급이라고 하는 빈농층이나 머슴 같은 이들이었어요. 이들은 오랫동안 어느 지방 한 동네에서 대를 이어 살아왔기 때문에 인정상이나 도리상 계급투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수도 있었겠지요. 복잡한 공산주의 이론보다는 ‘적개심’이 가장 효과적인 교육수단일 수가 있었습니다.

베트남이나 중국의 경우, 토지개혁 과정을 착근(着根)이라고 하여 노련한 당일꾼이 하방해서 마을의 농군 집에 기거하며 농사일을 도와주면서 의식화하여 농민 스스로가 토지개혁의 주체로 나서게 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경우 그런 여유와는 거리가 있었겠지요. 물론 이러한 조급성은 북한정권의 책임도 있겠지만 당시의 급박한 국제정세와 분단의 탓일 수도 있습니다. 초창기 북한정권의 종교에 대한 정책도 이러한 조급성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조만식이나 그와 비슷한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나 지방 향신층으로 이루어진 교계의 장로들을 포용하지 못했고, 이들 상반된 세력은 토지개혁에의 저항, 주일날 대의원선거의 강행과 불참, 그리고 테러와 체포, 처형으로 맞대결하게 되지요.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철천지원수의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전쟁 전까지 형성된 지하교회는 일종의 지하조직으로 되었던 겁니다. 백색테러로 유명한 서북청년단이나 한독당 또는 반공청년단의 정신적 근거가 사실은 기독교, 그중에서도 개신교와 깊게 관련되어 있거든요.

나는 베를린에서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사가 격변하는 현장에 있으면서 더욱 확신하게 된 생각이 있었지요. ‘나는 내 방식으로 세계를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현실주의적 생각을 동아시아적 형식에 담는다’는 생각입니다.

망명지를 뉴욕으로 옮긴 뒤에 통일운동 활동으로 알게 된 신천 출신 어느 목사에게서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자료를 통해 가졌던 의구심이 옳은 것으로 드러난 겁니다. 진실은 그 끔찍한 학살이 ‘우리들끼리’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내면적인 죄의식과 두려움이 지금도 그치지 않는 광적인 증오의 뿌리가 되었던 셈입니다. 북이 이 사건을 ‘미제’라는 원인제공자에게 돌린 것은 자신들 체제의 봉합과 해소를 위해서였을 겁니다.

『손님』은 한국전쟁시기 서로 죽고 죽이던 저러한 악몽의 45일을 몽환적으로 드러내는 한판의 해원(解怨)굿입니다. 사실 ‘손님’은 천연두의 민속적 별명이기도 합니다. 천연두는 17세기에 서양에서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를 통하여 중국의 양쯔강 이남을 휩쓸고 동북지방을 거쳐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특히 병자호란 뒤부터 조선에 창궐해서 풍토병이 되다시피 했지요. 백성들은 그것이 서병(西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호구별성(胡寇別星)이라고 불렀습니다. 호구는 오랑캐, 별성은 궁 지키는 수문장 같은 무서운 존재이므로 말 그대로 외국 병정을 말합니다. 천연두의 다른 별명인 ‘마마’라는 말도 당상관 이상의 무섭고 높은 이에게 붙이는 경칭이라는 점에서 천연두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천연두 자료를 찾아보면 각 시대마다 목차가 끝없이 나타나서 어느 자료를 뒤져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마을마다 수호신처럼 서 있는 장승이나 돌 무더기 따위도 무슨 이정표가 아니라 사실은 바로 외방에서 들어올 손님 귀신을 막자는 것이랍니다.

* 『손님』의 형식에 대하여

과거의 리얼리즘 형식은 보다 과감하게 보다 풍부하게 해체해서 재구성해야 됩니다. 삶은 놓친 시간과 그 흔적들의 축적이며 그것이 역사에 끼여들기도 하고 꿈처럼 일상 속에 흘러가버리기도 하지요. 역사와 개인의 꿈같은 일상이 함께 현실 속에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서도 안되고, 화자는 어느 누군가의 관점이나 일인칭 삼인칭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시점에 따라 서로를 교차하여 그려서 완성시켜줄 수 있을 겁니다. 한 인물과 사건을 두고도 모든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생각과 시각의 다양성으로 수를 놓듯이 말이지요. 객관적인 서술방법도 삶을 그럴싸하게 그린다고 할뿐이지 삶을 현실의 양태대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삶이 산문에 의하여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면, 삶의 흐름에 가깝게 산문을 회복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나의 형식에 관한 고민입니다. 우리 민담이 그런 점에서는 화자를 통하여 시간의 흐름을 전형화해서는 현실과 직접 대립하지도, 그렇다고 피해가지도 않으면서 고통과 비애를 넘어서지요. 나는 민담의 자연스러운 서사성의 비밀은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소멸해가는 삶을 중간 이야기꾼을 통하여 본래의 모양대로 복원한 데서 온다고 보는 것입니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민담이나 서사무가(敍事巫歌)가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옛날 틀’ 그대로 가져오거나 줄거리를 빌리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의 본질을 살펴보아야겠다는 겁니다.

『손님』은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하여 씌어졌습니다. 나는 이 작품을 과거로 떠나는 ‘시간여행’이라는 하나의 씨줄과, 등장인물 각자의 서로 다른 삶의 입장과 체험을 통하여 하나의 사건을 모자이끄처럼 총체화하는 ‘구전담화’라는 날줄로 서로 엮어서 한폭의 주단을 짜듯 하였습니다. 지노귀굿은 망자(亡者)를 저승으로 천도하는 전국적 형식의 ‘넋굿’입니다. 지방에 따라서 진오귀, 오구, 지노귀 등으로 불립니다. 아직도 한반도에 남아 있는 전쟁의 상흔과 냉전의 유령들을 이 한판 굿으로 잠재우고 화해와 상생의 새세기를 시작하자는 것이 작자의 본뜻이기도 합니다.

2001년 5월 황석영

Changbi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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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erca do autor

1943년 만주 창춘(長春)에서 태어났다. 고교 시절인 1962년 단편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고,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탑」이 당선되어 문학활동을 본격화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뒤 「객지」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등 문학사에 획을 긋는 걸작들을 발표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2000년대 이후 장편 『오래된 정원』 『손님』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등 역작들을 선보이며 소설형식에 대한 쉼없는 탐구정신, 식지 않는 창작열을 보여주고 있다. 만해문학상, 단재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아시아 유럽 미주 남미 등 세계 15개국에서 거의 모든 작품이 번역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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