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 러시아 현대대표시선

· 창비세계문학 Book 35 · 창비 Changbi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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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세닌, 마야꼽스끼, 블로끄, 아흐마또바, 빠스쩨르나끄, 옙뚜셴꼬 등

고전의 반열에 오른 러시아 현대대표시인 15인 시선집

 

러시아 현대대표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189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발표된 러시아 시 중에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을 선별해 수록하고 있다.

러시아 현대시는 1890년대에서 1920년대 초 사이에 전개된 모더니즘 시운동으로부터 비롯한다. 러시아 모더니즘은 상징주의, 아끄메이즘, 미래주의, 이미지즘과 같은 유파들을 낳으면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러시아 시의 르네상스를 실현한다.

러시아 모더니즘의 선두주자인 상징주의자들은 당대의 유물철학과 과학적 실증주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에 반대하면서 ‘새로운 시’를 추구하였다. 이런 상징주의 계열의 시인으로는 기삐우스, 발몬뜨, 브류소프, 블로끄 등이 있다.

기삐우스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현대시의 첫 페이지를 연 시인으로, 격정적인 세기말의 정서를 이전의 시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노래했다. 그녀의 시는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고 몰입하는 개인주의를 그 특징으로 한다.

발몬뜨는 러시아 상징주의 1세대의 거성(巨星)으로 추앙받은 시인이다. 그의 시는 일체의 사실적이고 세태적인 요소들이 제거된 미적 상상력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그의 시는 언제나 꿈이 현실을 압도하고 조형성보다 음악성이 지배적이 된다.

브류소프는 러시아 상징주의 1세대의 미학을 보여준 시인으로서 데까당의 선두주자였다. 그는 ‘자기가치적인 예술’을 추구했는데, 예술을 비합리적인 원리, 감성적 직관으로 운용되는 영역이며 예술가 개인의 주관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로 보았다. 그의 시는 예술미와 자아에 대한 숭배 경향을 보인다.

블로끄는 러시아 상징주의 2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간주되지만, 그의 창작적 경향은 후기로 갈수록 상징주의 틀에서 벗어난다. 그는 상징주의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나 러시아 서정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갔으며, 역사성과 당대성에 대한 지향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1910년대 초에 상징주의에 반대하는 일군의 시인들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들은 아끄메이즘이라는 유파를 형성하고, 상징주의에 의해 훼손된 러시아 시의 전통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아끄메이스뜨들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음악이 아닌 견고한 건축으로서의 예술을 지향하며, 신비주의적 거품을 걷어낸 언어 전통을 복원할 것을 주장했다. 그 전범을 조화롭고 명료하며 단순 소박한 뿌시낀의 시에서 찾았는데, 이러한 아끄메이즘 시인으로는 아흐마또바, 만젤시땀 등이 있다.

아흐마또바는 구체적인 사물과 일상적 체험을 소박하고 간결하게 시로 표현한 시인이다. 그녀는 여성적 주제를 여성의 언어로 표현한 최초의 러시아 시인으로 평가된다.

만젤시땀은 언어에 주목한 시인으로서, 그에게 말은 모든 인문적 유산, 즉 예술, 문화와 동의어였다. 그리하여 그는 시에서 말을 왜곡하고 훼절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였다.

쯔베따예바는 아끄메이스뜨인 만젤시땀과 교류한 시인으로서, 그녀의 시에서 서정적 자아는 결벽스러울 정도로 자주적이고 독립적이고자 한다.

아끄메이즘과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미래주의는 과거와는 단호하게 선을 긋고 극단적인 형식실험을 감행한 아방가르드였다. 이런 미래파의 주요 시인으로는 흘레브니꼬프, 마야꼽스끼, 빠스쩨르나끄 등이 있다.

흘레브니꼬프의 시는 난해하기로 특히 유명한데, 그에게 시는 ‘새로운 언어’ 창조의 일환으로, 여기서 ‘새로운 언어’는 말의 전반적인 개념과 구조의 전변을 뜻한다. 그에게 언어창조는 존재의 시원을 탐구하는 작업과 직결된다.

마야꼽스끼의 시는 전위적인 전복의 정신, 혁명의 리듬, 시대의 속도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청년시절 마야꼽스끼가 속했던 입체파 미래주의는 입체파 회화에서 미래예술의 단초를 발견하였으며, 입체파의 기법을 시에서도 똑같이 실현하고자 했다.

빠스쩨르나끄 시에서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자연과 사물이다. 그의 시에서 자연현상과 주변풍경은 마치 사람처럼 표정과 감각을 지닌다.

한편 이러한 모더니즘의 격랑 속에서도 예세닌은 러시아의 토속적인 풍경과 정조를 전통적인 양식으로 노래한 시인으로 그에게는 ‘농촌 시인’이라는 호칭이 늘 따라다닌다. 집요하게 농촌과 고향을 노래하긴 했지만, 애초부터 그의 시는 실향의 깊은 상처에서 나온 것이었다. 농촌에 대한 그의 지극한 애정의 밑바탕에는 실향민 의식과 이방인 의식이 있는 것이다.

 

 

상징주의, 아끄메이즘, 미래주의, 이미지즘까지

러시아 현대시의 르네상스를 담아내다

 

러시아 현대시의 향연은 쏘비에뜨 체제가 안착되기 시작하는 1921~22년에 그 막을 내리게 되며, 스딸린 통치시대로 접어들면서 러시아 시의 위대한 전통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이후 정치적 ‘해빙’의 물결이 일자 러시아 시의 위대한 전통은 다시 소생하게 된다. 옙뚜셴꼬, 보즈네센스끼, 아흐마둘리나, 브로드스끼와 같은 해빙기의 시인들은 러시아 시의 새로운 부흥기를 열어젖힌다.

옙뚜셴꼬는 해빙기 러시아 시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으며 대중적 인기를 누린 시인이다. 그는 자유와 개혁을 요구하는 당대 러시아인들의 정서를 예리하게 포착해내면서 그것에 부응하는 시를 써나갔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에 창작된 그의 시들은 웅변적인 어조와 시민적인 파토스가 강한 현실참여적인 시들이 주를 이룬다.

역시 대중적 인기를 누린 보즈네센스끼는 옙뚜셴꼬와 함께 소련 전후세대의 시대의식과 감수성을 대변한 시인이다. 그의 시 역시 청중 앞에서 낭송되는 ‘연단시’의 성격이 강했지만, 사회적 불의에 대한 저항에서부터 문명과 진보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 이르기까지 주제 면에서 넓은 스펙트럼을 보인다. 형식적인 면에서 그의 시는 다양한 실험적, 전위적 양상을 드러낸다.

아흐마둘리나의 시는 내향적이고 자기고백적이며 명상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 서정시의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 그녀의 시는 뿌시낀으로 대변되는 고전적 러시아 시의 향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브로드스끼는 20세기 초 러시아 모더니즘의 전통을 종합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존재와 세계에 대한 관조와 통찰이 정서적 층위를 압도한다. 대체로 그의 서정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노출하는 데 인색하며, 자신의 감정에 대해 중립적이거나 아이러니로 대한다.

러시아 현대시는 시 형식의 경이롭고 다채로운 혁신뿐만 아니라, 언어 전반에 대한 지극한 사랑, 인문적 유산에 대한 각별한 기억을 보여준다. 이 시선집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이런 러시아 현대시를 압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 차례

지나이다 니꼴라예브나 기삐우스

노래 / 책 표지에 남긴 글 / 헌사 / 사랑은 하나 / 밑바닥까지

 

꼰스딴찐 드미뜨리예비치 발몬뜨

나는 사라져가는 그림자를 꿈으로 붙잡았네 / 바람 / 나는 느릿느릿한 러시아어의 세련미 / 존재의 계명 / 나는 태양을 보기 위해 이 세상에 왔노라 / 우리 태양처럼 되자!

 

발레리 야꼬블레비치 브류소프

형식에 바치는 쏘네뜨 / 창조 / 젊은 시인에게 / 나 / 기쁨 / 좁다란 거리를 따라 / 서글프오, 그대와 나 둘만이 아니라서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블로끄

그대를 예감하오. 세월은 무심히 흘러가는데 / 나 어두운 성당으로 들어가 / 미지의 여인 / 축축한 적갈색 이파리에 / 분신 /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 /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죽은 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 밤, 거리, 가로등, 약국 / 오, 나는 미친 듯 살고 싶다

 

안나 안드레예브나 아흐마또바

나는 창가의 빛줄기를 향해 기도해요 / 나들이 / 같은 잔으로 우리 마시지 않으리 / 여기 우리는 모두 난봉꾼, 매춘부 / 그대는 지금 답답하고 울적하죠 / 나에게 목소리 들렸네 / 마지막 건배 / 보로네시 / 용기 / 세편의 시

 

오시쁘 예밀리예비치 만젤시땀

오로지 아동서만 읽고 / 침묵 / 노트르담 / 뻬쩨르부르그의 시 / 지팡이 / 뻬쩨르부르그에서 우리 다시 만나리 / 레닌그라드 / 오, 나 얼마나 원하는지

 

마리나 이바노브나 쯔베따예바

자살 / 너무 일찍 씌어진 나의 시들 / 나는 좋아요, 당신의 고통 나 때문이 아니라서 / 또다시 불 켜진 창 / 절도를 모르는 영혼 / 집 / 내 충직한 책상이여!

 

쎄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

어이, 루시여, 내 고향이여 / 사랑스러운 땅이여! 가슴은 / 개에 관한 노래 / 고향땅에서 사는 데 지친 나는 / 숲의 짙은 머리채 너머 / 조각된 목조 영구차 노래하고 / 나는 마지막 농촌 시인 /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 빛나라, 나의 별이여, 떨어지지 말고 / 안녕, 내 친구여, 잘 있게나

 

벨리미르 흘레브니꼬프

자루에서 / 보베오비 입술을 노래했고 / 우리는 온화한 신처럼 이곳에 오곤 했지 / 말이 죽어갈 때는 / 숫자들 / 한밤중의 영지여, 칭기즈칸하라! / 나와 러시아 / 이란의 노래 / 고독한 배우 / 다시, 또다시

 

블라지미르 블라지미로비치 마야꼽스끼

아침 / 밤 / 간판에게 / 당신들은 할 수 있는가? / 옜소! / 나와 나뽈레옹 / 시인 노동자 / 오월 / 청동 목청을 다하여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빠스쩨르나끄

2월. 잉크를 가져다 울어야 하리! / 나의 누이—삶은 오늘도 / 시의 정의 / 집에 아무도 없으리 / 햄릿 / 모든 것에서 나는 / 눈이 온다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옙뚜셴꼬

프롤로그 / 볼가 / 바비야르 / 스딸린의 후계자들 / 러시아에서 시인은 / 흰 눈이 내리네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보즈네센스끼

고야 / 반(反)세계 / 정적을 원한다! / 전례 없이 고통스러운 시절 / 숨이 멎을 듯 / 현재에 대한 향수

 

벨라 아하또브나 아흐마둘리나

나에게 많은 시간을 내주지 마세요 / 몇년째 내 집 앞 거리에 / 촛불 / 침묵 / 주문(呪文)

 

이오시프 알렉산드로비치 브로드스끼

잘 가라, 잊어버리고 책망하지 마라 / 고독 / 동사들 / 고향으로 돌아갈 거라고 / 1971년 12월 24일 / 고독은 사물의 본질을 가르쳐준다 / 나는 들짐승 대신 우리로 들어갔고 / 안나 아흐마또바 백주년을 기리며 / 자장가

 

옮긴이의 말

수록작품 출전

원저작물 계약상황

발간사

 

 

‖ 역자의 말

 

이 시선집에 실린 시들은 오늘날 고전으로 자리매김되는 러시아 현대시의 대표작들로서 시기상으로는 189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 세기를 포괄한다. 먼저 밝혀두지만, 쏘비에뜨 시절에 창작된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시들은 이 책에서 배제되었다. 여기 수록된 시들은 넓은 의미에서 모더니즘 계열에 속하며, 쏘비에뜨적 기준으로 보자면 대부분이 비공식 문학으로 분류된다.

러시아 현대시가 인류가 남긴 인문적 유산을 그토록 천착했던 이유는 인간존재의 의미, 개성의 가치와 존엄성이 바로 그것에 의해서 가장 진실하고 온전하게 구현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러시아 현대시 자체가 인간과 개성의 존엄함에 대한 생생하고 뚜렷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명현(안양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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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엮고 옮긴이 이명현

고려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모스끄바 국립대학에서 노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는 「서정적 주인공에 관하여」 「한국과 러시아 근대시에 나타난 윤리적 실존의 두 양상: 알렉산드르 블로크와 윤동주」 등이 있고, 역서로는 『나에게 줘!』 『검찰관』 등이 있다. 현재 안양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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