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황정은을 읽지 않는다면
처연하게 아름다운 세계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보겠습니다』는 2012년 가을호부터 2013년 여름호까지 ‘소라나나나기’라는 제목으로 계간 『창작과비평』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연재 종료 후 일년여 동안 심혈을 기울여 개고한 끝에 주인공 소라와 나나, 나기의 감정선이 더욱더 깊고 선명해져 행간에서조차 세 인물의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작품의 농도가 짙어졌다. 황정은은 앞선 두권의 소설집에서 기발한 상상력과 그것을 구현해내는 뛰어난 언어 조탁력을 보여주었고 그의 첫 장편이자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인 『백의 그림자』에서 기저에 품은 서정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계속해보겠습니다』는 그 서정의 결을 이어가면서도 잔잔하게 흘러가 폭발적으로 파급되는 황정은식 서정의 마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소라, 나나, 나기 세사람의 목소리가 각 장을 이루며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계속해보겠습니다』는 같은 시간, 한공간에 존재하는 세사람의 서로 다른 감정의 진술을 각각의 온도로 느낄 수 있다. 서로 갈등하는 소라와 나나의 속마음을 보는 것이나, 공유한 과거를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소설적 장치는 독자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등장인물의 작은 행동 하나, 대사 한줄에까지 감정을 밀도있게 싣고 마지막까지 그 긴장을 놓지 않고 이야기를 완성하는 작가의 집중력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다시금 황정은 소설의 자기갱신을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최근 “황정은 소설이 이제는 좀 무섭다”(젊은작가상 심사평)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 경이에 가까운 감탄은 비단 그만 느끼는 것은 아닐 터다. 그의 이름을 첫손에 꼽으며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는 이야기는 문단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과연 그의 소설은 어디까지이며, 그 간명하고도 아름다운 문장의 점층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기척도 없이 스며든 사랑
사랑을 미워해도 사랑은 사랑으로 다가오기를 멈추지 않는다
애자는 본인의 이름 그대로 사랑으로 가득하고 사랑으로 넘쳐서 사랑뿐인 사람이었습니다. 사랑뿐이던 애자는 그 사랑을 잃자 껍질만 남은 묘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88면)
애자는 없는 게 좋다. 애자는 가엾지. 사랑스러울 정도로 가엾지만, 그래도 없는 게 좋아. 없는 세상이 좋아.
나는 어디까지나 소라.
소라로 일생을 끝낼 작정이다.
멸종이야.
소라,라는 이름의 부족으로.(45면)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104면)
사랑하는 남편이 작업현장에서 사고로 죽자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온갖 활동을 시시때때로 정지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소라를 망가뜨리고 나나를 망가뜨리”(99면)며, 인생의 본질이 허망한 것이라고 세뇌하듯 이야기하는 어머니 ‘애자’의 곁에서 소라와 나나는 관계와 사랑, 모성에 대한 깊은 회의를 품고 자라난다.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멸종하기를 꿈꾸는 소라와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전심전력을 다하는 사랑을 경계하는 나나. 그 차갑지만 질서정연하던 세계에 모든 것을 흐트러뜨릴 사건이 발생한다.
언제라도 세계는 끝나버릴 것 같고 그 순간이 모두에게 처참할 것 같아 위태롭고 불안합니다. 소중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을 늘려버린 바람에, 나나는 예전보다 약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226면)
이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바로 나나가 배 속 아이에게 품게 된 감정이다. 나나의 임신에 누구보다 당황한 건 소라다. 애자의 세계, 곧 사랑의 폐허에서 자란 그녀들에게 임신을 하는 것이나 부모가 된다는 것은 그저 두려운 일일 뿐이다. 그러나 사랑은 어디에선가 기척도 없이 스며들고, 아무리 애써 밀어내도 어느새 가슴 한켠에 자기 자리를 스스로 마련해버린다. 세상이 언제 망하든 개의치 않을 것 같던 나나는 과연 세상이 아기가 살 만한 곳인가를 걱정하고, 음식을 신중하게 골라 먹는다. 소라는 요새 거슬리는 사람이 생겼다며 투덜거린다. 과연 소라와 나나는 평생 벗어나지 못한 황막한 폐허에서 꽃을 피워올릴 수 있을까?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줘.”(187면)라고 나기는 이야기한다. 이 대사는 아무도 축복해주지 않는 자신의 사랑을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이자, 소라와 나나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세계를 단단히 이어가고자 하는 결심과도 같은 것이다. 그들이 자라온 환경, 그들이 가진 세계관, 관계에 대한 믿음이나 불신까지도. 황정은은 이 처연하게 아름다운 세사람의 사랑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전에 본 적 없다고, 일반적이지 않다고, 이질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모든 존재는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몫만큼 애써 살아가고 있고, 그 모든 사소한 움직임 하나도 그들에겐 전부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목숨이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 그뿐,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며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한편 생각합니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나쁜 걸까.
소라와 나나와 나기 오라버니와 순자 아주머니와 아기와 애자까지 모두, 세계의 입장에서는 무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덧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걸까, 생각해보면 도무지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227면)
무의미하다는 것이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나나는 이야기한다. 무의미하고 덧없고 하찮더라도 모두 가까스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삶이 하나하나 소중하니까. 나나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이 소설의 제목과 같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문장이자 마지막 문장인 “계속해보겠습니다”는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의지를 담아 꾹꾹 눌러 천천히 곱씹듯 말하는 것일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가보겠노라고, 사랑해보겠노라고.
모두 잠들었습니다. 어둠속에서 그들의 기척을 듣습니다. 오래지 않아 날이 밝을 것입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228면)
*『계속해보겠습니다』가 더욱 특별한 것은 출간 후 6개월간 오디오북 서비스가 무료로 제공되기 때문이다. 최초로 초판부터 종이책과 오디오북을 결합해 동시에 출간한 ‘더책 특별판’이다. 디지털을 품은 종이책 ‘더책’은 책에 부착된 NFC 태그에 스마트폰을 대면 책의 내용을 오디오북으로 듣거나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는 획기적인 서비스이다. 종이책의 본질을 지켜나가면서 디지털시대에 맞추어 새롭게 제시하는 ‘더책’은 침체된 독서문화에 새바람을 일으킬 것이며, 양질의 문학서를 접할 기회가 적었던 시각장애인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주고, 언어교육이 필요한 현장과 다문화가정 등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전문 성우들이 등장인물의 감정선까지 예민하게 포착해 낭독한 『계속해보겠습니다』는 또다른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Changbi Publishers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와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가 있다. 2010년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